HOME | 로그인 | 회원가입
 
 
                   
 
 
   

 

민권사상의형성   ▶군주정비판   ▶공화정지향



안중근의 국권회복운동의 밑바탕에는 민권사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안중근의 민권사상은 봉건국가권력의 침탈에 모순을 느끼면서 형성되었다.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은 개화론자로서 박영효 계통의 인물이었다. 안태훈은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갑신년(1884)에 상경하여 박영효가 일본에 유학 보내고자 선발한 개화파 청년 70명 중에 끼어 있다가 갑신정변의 실패로 수구파 정권의 탄압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안중근 집안은 집안 살림을 모두 팔고 재정을 정리하고 가족들을 이끌고서 70-80명이 신천군 청계동 산중으로 이사까지 가야만 했다. 1895년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은 탁지부대신 어윤중과 전 선혜청당상 민영준으로부터 농민군과의 전투 중에 군량미로 소모한 쌀 상환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에 안태훈은 세력가 민씨의 압력을 피해 프랑스 신부가 있는 천주교당으로 피신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그 이후 안중근 집안은 해서교안에 연루되어 정부와 심한 갈등을 겪었다. 해서교안은 1901년부터 1903년까지 3년간 여러 차례 발발하였는데 상당수가 안중근 집안과 관련이 있었다. 안태훈(베드로)은 1897년 신천군수에게 체포되었다가 빌렘 신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으며, 1898년 2월경에는 안태건(가밀로)이 빌려준 돈을 받으러 갔다가 채무자들로부터 거절당하고 해주감사에게 체포되었으며 그를 구하러 간 안태훈 역시 투옥되었는데 빌렘 신부가 해주감사에게 항의하여 석방되었으며, 1899년 3월에는 안태건 등 천주교신자 4명이 도적으로 몰려 안악교졸에게 체포당하였는데 역시 빌렘 신부가 신천군수와 안악군수를 방문해 석방시켰다. 안태건은 장연사건에도 연루되었다. 신천의 천주교인 안태건을 비롯하여 12명이 법부의 훈령과 빌렘 신부의 서찰을 갖고 장연 관청에 난입, 염출한 돈의 반환을 요구하자 장연 군수는 이 사실을 관찰부에 보고하는 한편 장연 교우 6명을 체포하게 하였다. 1902년 2월 정부는 사핵사 이응익을 파견하여 안태훈과 안태건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빌렘 신부가 이들의 양도를 거절하는 바람에 좌절되었으며, 안태훈은 정치적인 문제에 과격하게 언급한 것이 화근이 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빌렘신부가 해주감사에게 교섭하여 석방되기도 하였다.

 

어윤중 민영준 등 수구파 봉건관료들의 수탈과 3년에 걸친 해서교안을 겪으면서 안중근은 봉건관리들의 학정과 토색에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의 사정을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그 당시 각 지방에 있는 관리들은 학정을 함부로 써서 백성들의 피와 기름을 빨아 관리와 백성 사이가 서로 원수처럼 보고 도둑처럼 대했었다. 다만 천주교인들은 포악한 명령에 항거하고 토색질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들이 교인을 미워하기를 외적과 다름없이 하였다. 그런데 저들은 옳고 우리가 잘못되어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 있었다.

백성들이 관리의 학정과 가렴주구를 원수나 도적처럼 보고 있으면서도, 오로지 천주교인만이 항거하여 토색질을 거부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였다. 안중근은 부패타락한 정부가 자신의 집안을 계속 탄압을 가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였다.

 

황해도에서 교인들의 행패로 인하여 행정 사법을 할 수 없다고 하여 정부로부터 사핵사 이응익을 특파하여 해주부에 이르러서는 순검과 병정들을 각 고을로 파송하여, 천주교회 우두머리 되는 이들을 옳고 그르고를 묻지도 않고 모조리 잡아 올리는 통에 교회안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아버지도 잡으려고 순검과 병정들이 2, 3차나 왔지만 끝내 항거하여 잡아가지 못했다. 몸을 다른 곳으로 피하여, 관리배들의 악행을 통분히 여기며 탄식하기를 말도 못하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어 심화(心火)로 병이 되어 중병에 걸려 몇 달 뒤에야 고향집으로 돌아 왔으나, 치료에 효험이 없었다. 그 때 교회안의 일은 프랑스 선교사의 보호로 차츰 조용해졌었다.

 

순검과 병정들이 집안을 급습하여 부친 안태훈을 체포하려 하자 안중근은 외국인 선교사에게 전보를 쳐서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안중근은 봉건국가의 학정과 관리들의 토색을 경험하면서 봉건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또한 안중근은 청계동 본당을 중심으로 활발한 교회 활동을 전개하여 총대(總代)로 추대되어 민권운동을 벌여 나갔다. 안중근은 서울 사는 전 참판 김중환(金仲煥)이 옹진 군민의 돈 5천냥을 빼앗아 간 일과 해주부 지방대병영 위관 한원교(韓元敎)가 옹진 군민 이경주(李景周)의 집과 재산과 아내를 강제로 빼앗은 두 가지 사실을 따지고자 상경하여, 교우들의 총대로서 피해자인 옹진 군민이나 이경주 등 교우들을 돕고자 하였다. 그리고 민권운동을 벌여나가는 과정에서, 문명시대란 법률로 사회를 다스리는 법치사회라는 인식도 갖게 되었다. 안중근은 청나라 의사 서가(徐哥)가 부친 안태훈에게 가한 행패에 맞서, 이 문제를 법률에 호소하여 진남포 재판소에서 “서(徐)는 그르고 안(安)은 바르다”는 판결을 받아 내었다. 안중근은 봉건사회를 개혁하여 문명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자유민권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독립문 밖을 지나면서 돌이켜 생각해보니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와 같이 친구(이경주)가 죄도 없이 감옥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고 겨울 날 차거운 옥 속에서 어찌 그 고생을 받는고 싶어서였다. 더구나 어느 날에나 저 같이 악한 정부를 한 주먹으로 두들겨 개혁한 뒤에, 난신적자를 쓸어버리고 당당한 문명독립국을 이루어 명쾌하게도 민권자유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이 거기에서 미치자 피눈물이 솟아올라 참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을 수가 없었다.”

 

안중근은 자유민권 확립을 통해 백성을 압제하고 수탈하는 악한 정부를 개혁하고 당당한 문명독립국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의 교육,식산운동은 자유민권 확립을 통한 근대국민국가 수립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이다. 이처럼 민권의식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안중근의 국권회복운동은 복벽주의, 보황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