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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의 기억투쟁! - 3.1 삼일운동(三一運動)- 범민족항일독립운동.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글쓴이 : 반민특위 날짜 : 2010-02-24 (수) 01:13 조회 : 573

 

 

반민특위의 기억투쟁! 

 

삼일운동(三一運動)

 

 

 

일본 식민지 지배하의 한국에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어난 범민족항일독립운동.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라고도 한다.

 

【배경】

1910년 이래 한국은 일본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통치하에 놓여 있었는데,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한민족의 항일독립투쟁은 각지에 의병(義兵)을 낳고 널리 민족계몽운동으로 발전하여 갔다. 일본은 이와 같은 민족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항일독립운동 투사들을 학살·투옥하고, 일체의 결사(結社)와 언론활동을 금지하였다. 교육정책에 있어서도, 우민정책을 실시하여 민족의식의 성장을 억누르고, 고도의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박탈하였다. 이러한 무단정치는 한국의 고유문화를 말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토지·광산·철도·금융 등 모든 분야의 이권을 독점 경영하였으며,

 

한민족의 경제발전마저 극도로 제한하였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하고, 특히 무력투쟁으로 혹은 외교활동을 통하여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선두에 섰다. 한편 국내의 대다수 농민들은 소작농(小作農)·화전민(火田民) 등으로 전락하였으며, 생활난으로 인하여 만주(滿洲) 등지로 유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본의 폭압(暴壓)은 지식인·학생·종교인뿐만 아니라, 농민·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의 반일감정(反日感情)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이 일본의 무단정치를 겪고 있을 무렵,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고, 1918년 1월 미국대통령 윌슨은 14개조로 된 전후(戰後) 처리원칙을 파리 강화회의(講和會議)에 제출하였는데, 그 가운데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고 하는,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원칙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세계의 피압박민족에 대한 자극제가 되었다. 이 민족자결주의의 새로운 원칙은 항일투쟁을 계속해오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조류 속에서 1919년 1월 22일 고종황제(高宗皇帝)가 갑자기 승하(昇遐)하게 되자 일본인들에 의한 독살설(毒殺說)이 유포되어 한민족의 일본에 대한 증오는 극도에 달하였다.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활동해왔으나 1917년 스톡홀름의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와 뉴욕의 세계약소민족회의 등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였다.

 

【각계의 3·1운동 상황】

 

 

 
         설명 : 만세시위운동 주동자들을 학살하는 일본군
 

 

1919년 3·1운동 당시 종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 시민들

〈천도교〉

 

1910년 9월 이미 일부 천도교도(天道敎徒) 사이에서는 국가적 신념이 강하면 그것이 곧 나라를 찾는 근본이 된다는 천도교의 구국적 신앙에 입각하여, 대중봉기운동을 동학운동의 재현과 계승으로 생각하고 그 이후 1919년 3월 1일까지 근 10년간을 준비기간으로 삼았던 것이다. 일부 천도교도는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자결자가 50여 명에 이르자 갑오동학운동(甲午東學運動:1894)과 갑진개화혁신운동(甲辰開化革新運動:1904)의 재현으로 천도교측이 솔선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신념과 평등·박애 사상으로 뭉쳐 있는 그리스도교와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1911년 1월 16일 손병희(孫秉熙)를 찾아가 갑오(甲午)·갑진(甲辰)의 민중운동의 재현을 건의했고, 다시 《제국신문(帝國新聞)》 창간의 중심세력이었던 대한제국 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보성사(普成社) 및 오세창(吳世昌)·권동진(權東鎭)·최린(崔麟) 등 동지들과 거사할 것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그 해 10월 신민회사건(新民會事件)으로 주춤하다가 1912년 1월 16일 임예환(林禮煥) 등과 농어민 포섭을 위해 그들의 배일감정을 조사하고, 범국민 신생활운동이라는 비정치적 민중운동을 보성사 중심으로 추진키로 하였다. 거사일은 일단 그 해 7월 15일로 정하였으나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불교계 인사와 접촉을 시도하여 독립시위운동의 연합전선을 모색하였으나 실패하자 10월 31일 민족문화 수호운동본부(民族文化守護運動本部)를 결성, 1913년까지 이 본부를 중심으로 강연회를 개최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무장세력양성을 위해 무기구입 문제까지도 협의하였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의 패망을 기대하고 보성사 내에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갑오·갑진 그리고 갑인(甲寅:1914)의 연결로서의 삼갑운동(三甲運動)을 추진하였다. 천도구국단의 첫 사업은 9월에 시작한 제1차 세계대전에 따른 국제정세분석이었다. 그들은 일본이 패망할 것으로 판단하고 수권태세준비로 선언문을 기초해 두었으나 1915년 9월 7일 발각 압수되었다. 1918년 l월 민족자결의 문제의식은 터득하였으나 이는 극히 회의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일면 무장세력 양성에 주력, 농어민·노동자·상인·학생 등의 범국민적 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들은 이미 5월 6일 3대원칙을 결정하였다. 즉, 민중운동은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을 고수하고 9월 9일을 제1차 민중봉기일로 정하였다. 그 이유는 일본 내의 쌀소동이 폭동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오독립선언문(戊午獨立宣言文)까지도 작성하였다. 그런데 11월 말경 독일이 패배하고 일본 등 연합국의 승리가 확정되어 주춤하였다. 그러나 강화회의가 1919년 1월에 파리에서 열리게 되면 국제정세는 반드시 한국에 유리하게 돌아갈 것으로 판단하였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자 국민의 격분을 야기시켰으며 그것이 민중운동의 봉기를 앞당기게 하였다. 2월 15일 천도교측에서는 유교·불교·그리스도교측과 학생단(學生團) 등과의 연락을 완료하고 3월 1일을 거사일로 택하였다.(처음에는 고종의 인산일인 3월 3일로 정했다가 불경스럽다는 의견이 나왔고, 또 2일은 그리스도교인의 안식일이라 하여 1일로 결정되었다).

 

 

 소총에 맞아 사망한 여학생

 

 

 

유관순 원래 모습

유관순 체포 이후 모습

유관순 체포 이후 모습(당시 17세) 

 

 


 

* 1919년 당시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캐나다 선교사들(헬렌 맥레, 수잔 맥클레이 등)의 사진입니다.

* 사진 원본은 캐나다 주정부 문서국에 보존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측의 독립운동은 관서지방의 예수장로교와 서울·경기 지역의 대한감리교 계통이 복합화되어 대동합류되었다. 즉 1919년 1월 말 천도교도들이 이승훈(李昇薰)을 만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1919년 2월 초순에 상하이[上海]로부터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선우혁(鮮于爀)이 국내와의 연락임무를 띠고 관서지방에 와서 이승훈 등과 협의하면서부터 독립운동에 활기를 더하게 되었다. 그 같은 항일의식의 고조는 숭실·숭덕·숭의·숭현 등 각급 학교 및 선천(宣川) 등의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시위운동의 준비를 진행케 하였다. 그러다가 2월 5일 천도교의 민중연합운동 취지를 이해하고 적극 참여키로 결심하였으며, 2월 12일 상경하여 참가를 쾌락(快諾)하였다. 여기서 이승훈은 그리스도교 대표로서 동지규합을 의논하고 거사일을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서울·경기 지방에서는 대한감리파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남녀학생을 포섭,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박희도(朴熙道)와 윤치호(尹致昊)가 19년 1월 하순경 연희전문학교 학생인 김원벽(金元璧)을 중간에 두고 강기덕(康基德)·주익(朱翼)·한위건(韓偉鍵)·김형기(金炯璣)·이공후(李公厚)·주종선(朱鍾宣) 등 학생들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협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울 예수장로파의 이갑성(李甲成)도 2월 중순경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구내 그의 자택에서 전기 남학생 10여 명을 소집한 자리에서 결정적인 시기가 도래할 때 나서 줄 것을 권유하였다.

 

 

 

 사진의 남자는 사진 촬영 직후 연행되었음.


 

 

〈학생〉

 

학생측의 독립운동계획은 1월 하순경 천도교측이 민중운동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본격화되었다. 박희도는 1월 29일경 서울지역 전문학교의 학생 10여 명을 대관원(大觀園)으로 초빙하였다. 이 자리에서 주익은 국제정세를 분석·보고하고 약소국의 독립기운이 조성되는 때에 우리가 궐기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상하이에서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파견하여 한국독립의 가능성이 더욱 고조되어감에 따라, 행동적인 방향을 모색하던 학생들은 시위운동으로 돌입할 기세를 취하였다. 이에 김원벽 등은 박희도와 협의하고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킬 때 조직이 필요함을 건의하여 각 학교별 동원책을 선정, 책임을 지우게 하였다. 강기덕은 서북친목회(西北親睦會)를 통해 동원태세를 확인, 확약을 받고 경성고보(京城高普)의 김백평(金柏枰) 등, 중앙(中央)고보의 장기욱(張基郁) 등, 선린상업(善隣商業)의 이규종(李奎宗) 등, 보성(普成)고보의 장채극(張彩極),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의 전동환(全東煥) 등을 통해 2중의 동원조직을 확립해 두었으며, 김원벽은 경신(儆新)고보와 경성고보의 박쾌인(朴快仁) 등을 통해 역시 2중의 동원조직을 완료하고 선언서도 배부하였다. 한편 한용운(韓龍雲)은 2월 말 불교 중앙학림학생 백성욱(白性郁)·김법린(金法麟) 등 10여 명을 계동(桂洞) 유심사(惟心社)로 초치하고 독립만세시위의 계획을 설명하자 이들은 결연히 동참할 것을 수락하였다. 여고보(女高普)학생도 이 운동에 의연히 계획과정에서부터 참여하였다.


 

 

 

【해외 국민국가 형성운동계획의 과정】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한 것은 1918년 8월 하순경에 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김철(金澈)·조동호(趙東祜) 등이 상하이[上海]에서 결성한 신한청년당이었다. 그 해 11월 미국대통령 윌슨의 특사 크레인이 강화회의에 관해 미국측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이때 그를 환영하는 대회에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여운형이 참석하였다. 그는 크레인을 면회하고 독립에 대한 열망을 표하면서 우리의 대표도 그곳 강화회의에 참석하게 할 것과 그에 따른 제반 협조를 요청하였다. 크레인은 명확한 답변을 회피하였다. 그러나 당의 명의로 파리강화회의의 대표에게 보낼 <한국 독립에 관한 요망서>(1918.11.28)도 작성하여 크레인에게 그 회의에 전달해 주도록 당부하였다. 당으로서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한국대표로 김규식을 선정하고, 국내에는 선우 혁·김철·서병호(徐丙浩)·김순애(金淳愛)를 파견하여 군자금 모집과 상하이 동지들의 독립열망에 따른 국제정세를 전달하였다. 또 일본에는 조용은(趙鏞殷)과 장덕수를, 노령(露領)과 만주(滿洲) 일대에는 여운형을 파견하여 독립운동문제를 광범위하게 협의하도록 하였다. 1919년 2월 초 선주(宣州)에 온 선우 혁은 이승훈을 만나 의견을 교환하다가 군자금의 전달을 약속받고, 평양에 가서 독립시위운동을 권유하고 상하이로 갔다. 2월 초순경 상하이를 떠날 때, 신규식(申圭植)으로부터 그곳에서 행할 임무를 부여받아 도쿄[東京]에 도착한 장덕수는 2월 하순 서울로 들어왔다. 한편, 김규식은 2월 1일 파리로 향하였는데, 신한청년당으로부터 그곳에서 활동할 지침 12개 항목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부탁받았다. 그의 활동이 당장은 큰 효과가 없었으나 그의 파리 강화회의 참석을 위한 파견 사실이 국내외의 독립운동의 구실과 촉진제가 되었다는 면에서 주목과 평가를 받는 것이다.

 

 

〈시베리아·만주 일대〉

 

해외의 독립기지로 유명한 곳은 서간도(西間島)의 삼원보(三源堡)와 밀산부(密山府)의 한흥동(韓興洞)이었다. 이 곳을 중심으로 민족교육과 독립군의 간부양성을 위한 기관이 설치되었으며 1914년에는 이상설(李相卨)과 이동휘(李東輝)를 정·부통령(正副統領)으로 하는 대한광복군정부가 수립되었다. 이곳에서의 독립운동계획은 동삼성(東三省)에서 중광단(重光團)의 여준(呂準)·이동녕(李東寧) 등이 국민국가 성립을 위해 1918년 12월(음력) <무오독립선언문(戊午獨立宣言文)>을 발표한 것이 최초의 일이었다. 이 무오독립선언문은 완전독립을 쟁취하려는 전쟁의 의사가 분명한 과격하고도 독립국가성립의 의지가 강렬한 내용이 담겨진 것이 특징이었다. 시베리아에서는 이동녕이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계획, 추진하였다. 특히 연해주(沿海州)의 대한국민의회에서는 윤해(尹海)와 고창일(高昌一)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다. 1912년 2월 전노한족회(全露韓族會)가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확장되면서 윤해와 고창일을 이곳 한교(韓僑)의 대표로 삼아, 파리뿐만 아니라 국제연맹과 약소민족회의 등에도 파견함으로써 신한청년당과의 연합활동을 모색했다.

 

 

〈미주지역〉

 

미주에서의 독립운동은 1913년 로스엔젤레스에서 안창호(安昌浩) 등이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비공식적으로나마 알려진 1916년 5월부터 이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해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고무적인 소식은 더욱 이들의 독립의식을 자극하였다. 따라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서는 1917년 10월 박용만(朴容萬)을 세계약소국 민족동맹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케 하여, 한국의 식민지적 현실을 호소하고 독립해야 함을 역설토록 하였다. 1918년 12월 1일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재미한인 전체 대표자회의(在美韓人全體代表者會議)를 소집하고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한국대표로 이승만(李承晩)·민찬호(閔瓚鎬)·정한경(鄭翰景) 3인을 선정하고 군자금으로 30만 원을 모금하기로 결정하였다. 뉴욕 일대에는 신한협회(新韓協會)가 조직되어 11월 말 이후 독립결의서와 진정서를 미국 국무성과 주요 정객들에게 전달하였다. 이승만·정한경 등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大韓人國民會中央總會) 명의로 1919년 2월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독립을 호소하였고, 서재필(徐載弼)도 《이브닝 레저》지(誌)의 기자 베네딕트와 상의하여 한국문제를 세계여론에 호소함으로서 독립국가 건설의 의욕을 북돋았다.

 

 

미국 한인들이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모습

 

87년 전 미국 한인들이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모습이 담긴 희귀 사진이 발견됐다. 사진은 1920년 캘리포니아주 중부 다이뉴바에 살고 있던 150여명의 한인들이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년째를 맞아, 시가행진을 펼치며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던 장면을 담고 있다. 행렬 맨 앞에 사자탈이 보이고 그 뒤로 ‘코리아’라는 팻말과 성조기를 단 차량이 따르고 있다. 이 사진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 한국학도서관이 한국 관련 사진을 디지털 복원하는 과정에서 입수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발행되는 <크리스천헤럴드>는 이 사진을 최근 발간된 6권짜리 미주 및 멕시코 이민사에 실어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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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리포니아 중부지역 한인적십자사 회원들이 1921년 제2회 기념식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
대형 태극기와 함께 뒤편으로 독립문 모형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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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뉴바에서 열린 3.1운동 1주년 기념식에 참가한 한인적십자사 여성회원과 한인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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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1주년 기념식을 빛낸 어린이 악대. 뒤편으로 다이뉴바의 한인 교회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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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다이뉴바의 한인장로교회에 모인 한인들.
3.1운동 기념식이 지난 1920년의 다른 시기에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제공= 남가주대학

 

▲ 다이뉴바의 한인장로교회에 모인 한인들. 3.1운동 기념식이 지난 1920년의 다른 시기에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 기념행사를 마친 한인들이 다이뉴바의 중심가로 나와 행진하고 있는 모습. 행렬의 맨 앞에는 사자탈이 보이고 그 뒤로 ‘KOREA‘라는 팻말을 앞에 달고 성조기와 태극기를 꽂은 차량들이 따르고 있다

 

▲ 3.1운동 1주년을 맞은 1920년 캘리포니아주 중부의 다이뉴바에 있는 한인 장로교회 옆에서 한인들이 모여 성대한 기념식을 가진 모습. 맨 왼쪽에는 흰옷을 입은 한인적십자사 회원들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있고 그 오른쪽에는 성조기와 함께 태극기가 게양됐다

 

[이상 자료출처 : 한겨레신문]

 

〈재일한국동포〉

 

일본에서는 한국인 지식층이 영국인 발행의 1918년 12월 15일자 《저팬 애드버타이저》지에 실린 <한국인들의 독립을 위한 주장>이라는 기사에 고무를 받고, 또 18일자에 실린 약소민족들의 발언권 요구에 관한 기사에 다시 한 번 자극을 받아 조국의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연말을 전후로 한 학생들 모임 이후 1919년 1월 6일 조선 YMCA회관에서 열린 조선유학생 학우회 주최의 웅변대회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일본 내각과 각국의 대·공사(大公使)에게 청원할 것을 결의하고, 그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전영택(田榮澤)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그 뒤 전영택은 병으로 사임하고 새로 이광수(李光洙)와 김철수(金喆壽)가 추가선출되어 11명이 되었다. 막후에서 이를 위해 진력한 최원순(崔元淳)·변희용(卞熙瑢)·최승만(崔承萬) 등은 동지규합, 장소물색, 군자금조달, 국내와의 연락, 학생운동의 방향결정에 공헌하였다. 실행위원은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결성하고 2월 7일 국문·영문·일문의 3개 국어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등사하였으며, 일문(日文)의 민족대표소집청원서(民族代表召集請願書)를 1,000여 매 인쇄하여 2월 8일 각 요로에 모두 발송하고, 그날 오후 2시 YMCA 회관에서 약 400명의 남녀 한국유학생이 모인 가운데 ‘2·8독립선언’을 실행하였다. 이로 인해 40여 명이 즉각 체포되었다가 실행위원 11명 중 9명이 주모자로 판명되어 최고 금고 9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이 운동은 국내 3·1운동에 촉진제의 구실을 했으며 그 뒤 2월 12일 이달(李達) 등 수십 명의 유학생이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시위를 계속하고, 19일 변회용·최승만 등 9명이 역시 같은 장소에서 시위를 결행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3·1운동과 그 전개】

 

독립운동을 보다 효과적이고 대중적으로 확산·파급시키기 위해서는 이 운동의 필요성·성격·방향·이념 등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선언서, 즉 ‘독립선언서’가 요청되었다. 원로 정객 및 지도자와의 수차에 걸친 교섭에 실패한 천도교측 중진들은 민중운동 3대 원칙에 따라 우선 그리스도교와의 연합을 모색하였다. 천도교와 그리스도교를 연결하는 데 공로가 있는 사람은 최남선(崔南善)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신민회(新民會) 때의 동지이기도 했던 언론인 출신의 이종일(李鍾一)의 숨은 공로가 이승훈과의 원만한 연락을 취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종일의 전보를 받고 상경한 이승훈에 의하여 조직·자금 등을 통해 관서지방 그리스도교도들과의 연합모색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2월 12일 늦게 선천에서 상경한 이승훈은 그리스도교측과의 대동합류를 권고받고, 13일 귀향하여 교계 대표급 인사와 상의하고 합의를 보았다. 이승훈은 2월 17일 다시 상경하여 서울·경기지역의 그리스도교계 중진을 만나 천도교측과의 합류교섭을 대찬성하고 봉기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스도교측은 2월 22일까지 천도교측으로부터의 자금조달을 통해 대동연합전선을 펼 것에 찬성하고,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만세시위운등을 일으키려 하였다. 타교와의 연합은 2월 10일경 최린이 한용운을 만나 그로부터 민중운동에의 참여와 민족대표로서의 참가를 쾌락받았다. 남은 문제는 천도교측이 그리스도교측과의 합의에서 결정을 본 독립선언서의 기초와 인쇄, 그리고 배포·전달의 진행과정이었다. 최남선은 자원하여 온건한 내용의 독립선언서를 집필하였다. 그는 2월 11일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완료하고 2월 20일부터 인쇄하기 시작하였다. 2월 27일밤까지 보성사에서 3만 5000매를 인쇄완료하여 배포단계에 들어갔다.

 

독립선언서는 이미 제1차 인쇄가 완료(2월 25일)된 다음날인 26일부터 천도교·그리스도교·불교측과 남녀학생들에게 전달되었다. 천도교측은 인종익(印宗益)·안상덕(安商德)·김홍렬(金洪烈)·이경섭(李景燮) 등에게 전달하여 각 교구로 배포되고, 그리스도교측에서는 이갑성(李甲成)·오화영(吳華英)·김창준(金昌俊)·함태영(咸台永) 등에게 주어 각기 8도를 분담, 배포한 지 3일 만에 거의 전국적으로 배달되었다. 이것은 천도교의 각 교구와 그리스도교의 각 교회, 불교의 각 사찰로 배포 전달되었다. 학생측은 박희도·김문진 등에게 차례로 연결되어 김성국(金成國)과 강기덕·김원벽 등에게 넘겨졌으며 서울시내 그리스도교계 여학교에도 배포되어 3월 1일에 여학생을 다수 동원할 수 있었다. 한편 민족대표로 천도교측에서는 손병희 등이 동지 15명을 선정하고, 그리스도교측은 이승훈 둥이 동지 16명을 선정하였으며, 불교측에서는 한용운이 백용성(白龍城)을 넣어 모두 33명이 되었다. 거사일자는 3월 1일로 최종결정되었다. 2월 28일 가회동 손병희 자택에서 최종 모임을 통해 서로 인사도 나누고 결의도 다짐하였다. 23명이 모인 그 회합에서 손병희는 이번의 의거는 민족적 지상과업임을 전제한 뒤 총의에 의하여 성취될 것을 굳게 믿는다고 격려 고무하였다. 그 모임에서 박희도의 긴급제의로 만세장소에 대해 폭동의 우려가 있다고 하자, 손병희가 파고다공원에서 인사동 소재 태화관으로 변경할 것을 제의하여 3월 1일 오후 2시 30여 명이 동시에 모일 수 있는 방을 예약해 두기로 하고, 검찰에 자원피착(自願被捉)의 결의를 다짐하였다.

 

 

귀 절단

 

【3·1독립만세의 경과】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의 태화관은 긴장과 신념과 의지가 함께 교차하는 가운데 민족대표 33명 중 29명이 예약한 방에 모였다. (지방에 있던 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는 불참) 이때 독립통고서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서영환(徐永煥)에 의해 조선총독부에 제출되었고, 이내 파고다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만세장소변경에 당황하고 강기덕 등을 보내 항의하는 소동도 있었다. 오후 3시 손병희의 제의로 한용운이 독립운동의 결의를 다짐하는 간략한 인사에 이어 그의 선창으로 만세 3창을 고창하였으며, 불과 15분 만에 전격적으로 낭독식을 끝내고 통고한 대로 경찰이 오자 스스로 체포되어 갔다. 한편 파고다공원에서는 2시 30분경 수천 명의 학생단이 당초 계획과는 달리 별도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가로 나가 시위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남녀학생들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전국에서 상경대기하던 시민과 민중이 가담하여 그들의 독립시위의 의지와 열기는 더욱 고조되어 갔다. 학생과 시민의 ‘혼성 독립시위 군중’의 시위경로를 보면 일단의 군중은 파고다공원에서 종로를 경유, 서울역전·의주로·정동·미국영사관·이화학당으로 해서 다시 광화문·서대문·프랑스영사관·서소문·소공동으로 진행하다가 충무로 일대에서 일경의 저지를 받고 일단 해산하였으나, 다른 군중과 연합하여 또 일단의 모임을 만들어 광화문을 거쳐 대한문 앞에서 또다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파고다공원 후문으로 나선 학생과 민중들은 창덕궁·안국동·광화문 앞에서 서대문을 경유, 프랑스영사관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한 뒤 다시 이화학당·정동·미국영사관·대한문 앞으로 해서 충무로를 거쳐 동대문 방향으로 가서 그 문 위에서 독립만세를 절규하여 전국적으로 확대 파급되었다. 천도교의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에서는 그날의 민중시위운동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震天動地의 萬世聲, 太華館 萬世聲이 나자 同時에 塔洞公園에 會在하얏던 數萬의 學生이 朝鮮獨立萬世를 齊唱하면서, 手舞足踏하면서 風蕩潮勇의 勢로 長安을 貫中하니 枯木灰死가 아닌 우리 民族으로 誰가 感泣치 아니하리오. 一刻一刻 增加하난 萬世聲이 鐘路四街에 至하야는 天地가 震動하얏더라” 이 신문에서는 ‘여학생(女學生)의 의용(義勇)’이라는 기사도 취급하여 특히 관립여학교 학생들이 기숙사를 탈출, 만세시위운동에 과감히 참여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여성들의 독립시위운동에의 의욕을 북돋워주었다. 조선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는 5일 늦게야 겨우 수십만 명이 참가한 사실을 비로소 논평 없이 간략하게 보도하였다. 이와 거의 같은 날 같은 시각인 3월 1일 평양·의주·선천·안주(安州)·원산(元山)·진남포(鎭南浦)의 6개처에서 봉기하였고, 다음날은 함홍(咸興)·수안(遂安)·황주(黃州)·중화(中和)·강서(江西)·대동(大同)·해주(海州)·개성(開城) 등 주로 이북 전지역에서 차례로 일어났으며,

 

그 밖에 전라북도는 4일 옥구(沃溝) 시위로, 경상북도는 8일 대구(大邱) 시위로, 전라남도는 10일 광주(光州) 시위로, 강원도는 10일 철원(鐵原) 시위로, 함경북도는 10일 성진(城津) 시위로, 경상남도는 11일 부산진(釜山鎭) 시위로 각각 번져갔고, 19일에는 괴산(槐山) 시위로 충청북도에 점화됨으로써 전국 13도가 일제히 3·1운동의 대열에 나서게 되었으며, 21일 제주(濟州)와 조천리(朝天里) 시위로 바다 건너 제주도에까지 파급되어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각 지역에서 만세운동의 주체는 각계각층을 망라하였다. 천도교·그리스도교·불교·학생측 외에도 각 지방의 만세운동에는 농민이 가담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도시의 상인들은 연합하여 철시를 단행함으로써 일제에 항거하였으며, 노동자·승려·관리는 물론 어린이·거지·기생이 주동한 곳도 있었다. 동시에 해외 각지에서도 이미 국민국가 형성을 위한 독립운동의 계획이 진행 중에 있었거니와, 이 소식에 자극을 받아 3월 10일 이후 만주·미주·중국·일본 등지에서도 국내 3·1운동에 호응하여 만세시위운동이 확산되었다. 3·1운동 이후 3개월 간의 전국 독립만세 시위운동 상황을 보면 집회 횟수는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 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피체인원수 4만 6948명이며 소각당한 교회당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다. 이때 서울의 10개교에서 여학생이 참가한 인원은 1,929명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통계는 이 운동이 어떤 지도력에 의하여 인도되었다기보다는 전국민이 계층별·남녀별·지역별·학력별·연령별 할 것 없이 전부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시민혁명적 의식성장의 면에서 3·1운동은 곧 시민국가 성립운동의 성격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국민국가 수립의 의지

 

이상을 토대로 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① 이 운동은 근대적 민중의 정치의식이 개화의식에 의해 태동하고 발전한 국민국가 수립을 향해 민중운동으로서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민혁명운동으로서의 범국민운동이었다.

 

② 이 운동은 초기부터 민주정부를 탄생케 할 민중국가 연합전선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국민에 의하여 국내외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났으며, 그것은 상호보충적 민족울분으로 인해 가능해진 국민단합과 총화의 민족주의 의식성장의 민족독립운동이었다.

 

③ 이 운동은 종교계에 의하여 1910년부터 주도되었는데, 그것은 동학혁명운동과 개화혁신운동의 정신을 재현하는 입장과 전통적인 사상의 맥락에 의하여 시민의 힘을 바탕으로 일으키고 참여시킨 항일자주독립운동의 분수령이 되었다.

 

④ 이 운동은 비록 지도자는 없었다 하더라도 독립완수라는 민족전통의 숙원에 의하여 농어민을 다수 참가시켰고, 학생·상인·노동자·공업종사자·교사 등의 계층을 차례로 대동합류시켰으며, 종교인으로는 그리스도교와 천도교인이 가장 많이 참여하였고 불교·유교의 순위였으나 무종교인의 참여는 전체 입감자(入監者)의 60 %를 차지하였다. 학력별로는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졸업 이상의 교육정도와 무교육자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시민운동의 성격을 시사하고 있으며, 연령별로는 30세 미만자가 전체 입감자의 반 이상이 됨으로써 청장년층이 중심적으로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⑤ 이 운동으로 인해 무정부상태에서 민간정부인 정통정부를 탄생시켰으며 비로소 민족운동의 본궤도를 형성하여 독립쟁취를 위한 민족진로의 3대 방향감각을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민족실력의 양성, 외교자립의 노력, 무장세력을 양성하여 독립전쟁을 가능케 하였다. 국내에서는 계속해서 보성사 팀이 중심이 되어 제2의 3·1운동을 무장세력에 의하여 천도교 단독으로 전개하여 재시위할 것을 기도하였다.

 

⑥ 이 운동은 조직적이고 구조적으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는 점이다. 지방에서는 정기시장을 항일운동의 터전으로 삼았으며, 도시에서는 각급 학교를 통해 맹휴(盟休)항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소작쟁의(小作爭議)·노동쟁의 등 근로대중 계층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각급 직업인의 직장을 중심으로 파업·태업선동·퇴직·결근 등의 지속적인 항쟁을 계속하는 전통을 수립해 주었다.

⑦ 이 운동은 ‘세계혁명사의 신기원’으로 평가된 중국 5·4운동과 4월 6일 인도 무저항배영운동(排英運動)인 제1차 ‘사티아그라하’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 지역에서의 민족운동을 촉진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⑧ 이 운동은 이 같은 국내외에서 새로운 형태의 민족운동을 촉진시켰기 때문에 분명히 한국의 민족주의 민족운동의 가능성을 제시해준 것이었다. 따라서 이 3·1독립운동은 남녀·빈부·귀천·지벌·문벌·학벌 등을 초월한 ‘전한민족계층’의 자주 자립을 절규한 민중운동으로서의 단합 결속된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 3·1운동은 실학·동학·개화·척사(斥邪)·그리스도교·불교·성리학적 사상의 복합화 위에서 민중사적 저류에 흐르고 있는 자유·정의·진리·평화·양심의 근간정신이 내재적으로 성숙발전되어 오다가 1919년 3월 1일 식민지적 현실부정의 강한 형태로 폭발한 시민혁명의식의 구체화이며 그 성공이었다. 따라서 이 운동은 1919년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연면성을 띠고 활기있게 발전되고 있거니와, 군주권에 결별을 고하고 국민국가의 수립을 가져오게 한 시민들의 근대화운동이며, 민족의 통일을 지향한 단합과 자강(自彊)에의 열도 있는 국민운동이었다.

 

 

 

3.1운동 당일 날의 전단지에서-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태상황제가 승하하신 원인을 아시는가 모르시는가? 평소 건강하옵시고 또 아프시다는 환보도 없으신 분이었는데 아닌 밤중에 잠자리에서 갑자기 서거하셨으니 어찌 이것이 이변이 아니리오 아 2천만 동포여, 금일은 세계 개조의 날이요 국권회복의 날이니 일어나라 일어나라.
-3.1운동 당일 날의 전단지에서-

 

-> 이것을 보니 운동일이 고종의 인산일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겠죠?^^

이때 사람들은 고종의 인산일(3.3이 원래 인산일)에 참여하기 위해

다수가 경성으로 모여있었고, 의문의 죽음이었기에, 모인 사람들의 분노가

매우 높았습니다. 무엇인가 크게 일어날 분위기였죠^^

 

 

3.1절 관련 고영상방송 (1953~1990)

 

총영상길이 2시간여.

간혹 무성영상이 있습니다. 혹은 필름손상으로 영상이 어지러운 경우도 있습니다.

 

[촛불의 초심방송집단]

 

3.1운동의 충격과 영향을 받은 중국 북경대학생들은 5.4운동을 일으키면서 한국의 학생들을 본받자고 호소했다. 특히 5.4운동을 주도한 북경대학 학생대표 부사년(傅斯年)은 ‘한국독립운동의 교훈’이란 글에서 한국민족의 3.1운동 특징을 세 가지로 평가하고 중국민족이 배워야 한다고 제기했다. 첫째, 무기를 갖지 않는 비폭력 혁명이었다. 둘째, 불가능한 것을 알고 한 혁명이었다. 셋째, 순수한 학생혁명이었다고 분석하면서 “혁명사에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3.1절이 어찌 하루 노는 날로 치부되며 그 나마 태극기 게양하는 일조차 잊는 날이 되어야 하겠는가?


기미년 3.1운동은 피압박 민족 해방운동사에서 세계사적인 의미의 대사건이다. 왜 그런가. 내적으로는 민족독립의 피어린 저항이었고, 외적으로는 아시아. 중동지역에서 새로운 민족해방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 반영(反英)운동, 이집트의 배영운동, 터키의 독립운동을 차례로 촉발시켜서 한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세계만방에 선양하게 되었다.

아직도 청산되지 않는 친일매국세력들과 후손들이 활개치며 사는 대한민국, 세월이 지날수록 3.1운동이 하루의 공휴일, 의례적인 기념일로 화석화되어 가고 있어 가슴 아프다. 나라를 빼앗긴 지 9년 만에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일제의 총칼에 맞서 싸우고 그 과정에서 일제는 시위군중 7509명을 학살하고 1만5961명을 부상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3.1운동은 한민족이 결코 일제에 나라의 주권과 2천만 동포의 생명과 우리의 역사를 빼앗길 수 없다는 민족적 저항이었다. 3.1운동은 계층. 지역. 종교. 나이를 뛰어 넘어 한민족이 하나가 되어 포악한 일제 침략주의에 비폭력 평화적 방법으로 맞서 조국독립을 요구하는 투쟁이었다. 3.1운동을 통해 우리는 잠시나마 상실했던 국권회복을 선언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워 국맥과 법통을 승계하였다. 3.1운동 이전의 모든 항일투쟁과 국권회복운동은 3.1운동으로 결집되고, 그 이후의 민족해방투쟁과 민주화운동은 여기에서 발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운동을 계기로 몇 갈래의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전개되고, 이것이 통합을 거쳐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한민족의 정통성과 법통을 잇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왕정복고, 입헌군주제, 사회주의정부 등 여러 가지 정부형태가 논의되었지만, 치열한 토론을 거쳐 민주 공화제를 채택하고, 이것은 대한민국 건국으로 승계되었다.

3.1운동은 세계 혁명사에서도 이와 같은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높은 역사의식을 찾게 된다. 여기에는 몇 갈래의 사상적인 배경과 항쟁의 계기가 접목된다. 첫째는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로 인해 온 국민이 국권회복의 열망에 차 있었다. 둘째는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발표로 민족지도자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 독립을 호소하려 하는 등 국제정세를 적극 활용하는 기회를 포착하였다. 셋째는 일본 도쿄의 한국 유학생들이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귀국하여 국내에서 3.1항쟁을 준비하였다.

넷째는 1918년 만주 일대에서 무오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만주. 노령. 중국. 미주 등 해외 망명 지사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 다섯째는 국내에서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초기부터 일부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천도교의 손병희 등과 불교계의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기독교측과 불교측의 지도자들을 규합하였다.

3.1항쟁의 기본정신은 민족의 자주 독립이었다. 89주년이 되는 지금까지 우리는 분단상태이고 ‘반쪽 자주독립’에 머물러 있어서 3.1정신은 현재 진행형이 되고 있다. 애국 선열들이 혹독한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독립을 선포하고, 총칼에 희생되면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한 ‘3.1정신’을 회복하여 반드시 친일매국세력을 청산하고, 민족사 바로세우기와 국민주권,그리고 민족통일. 하나되는 과업을 달성하는 것이 진정한 3.1정신의 계승이고 완성이 될 것이다.
 
또한 3.1운동을 주도했다는 집단들과 관련하여 만해 한용운 선생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이 따위 것을 독립선언문이라고 만들었냐고 집어 던졌다고 한다. 그래서 끝에 행동강령을 따로 적어서 넣었다고 한다.
 
3.1 독립선언이 있은 후 한용운 선생은 빠져 나가고, 민족대표라는 작자들은 자수한다. 그리고 천도교, 천주교, 개신교, 불교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친일행각을 벌이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해당 종교계에서 반성이 없다. 천주교에서는 심지어 안중근 장군에 대한 부정까지 했다. 안중근 장군은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다.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나서 먼저 나서서 살인자이므로 천주교에서 그를 배제시킨다고 발표를 했던 것이다. 개신교나 불교도 다를바 없었다. 일제의 눈치를 보며 일제에 협조를 했다. 그들 중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애써 부정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비굴하게 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종교라는 특별한 입장 때문에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독립 운동가로 알려진 사람들 중에 친일파들이 있다. 또 민족 음악가니 민족작가니 하는 사람들 중에서 많은 수가 친일파였다. 이런 것들을 모두 규명을 하고 제대로 밝혀야 하는데, 일본 오사카 출신에 일제 침략주의를 찬동한 뉴라이트 세력의 절대 지지를 받고 있는 이명박 정부는 과거사위원회 해체운운하며 그것을 막으려고 하고 있다.
 
오늘은 3.1절이다.  3.1절의 의미는 이름이나 올려놓고 주도했다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주인공들이 아니라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일반 민중들이 일제에 항거한 것이 가장 큰 의미다.  진정한 3.1운동의 계승은 당시 기회주의적이던 지식인들이나 변절한 민족지도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민중들이 마음에 가지고 있던 민족해방의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특수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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