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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7 한국광복군창립 70주년 기념 항일 & 친일 시민음악회 !아이들 손잡고 금요일 7시에 보신각으로 7시에 오십시요. 좋은 교육이 될것입니다.|

글쓴이 : 반민특위 날짜 : 2010-09-13 (월) 21:50 조회 : 622


9.17 한국광복군창립 70주년 기념 항일 & 친일 시민음악회

 

 

일시: 2010.9.17(금) 저녁 7시

 

장소: 종로구 소재 보신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유일한 공식군대인 ‘한국광복군’의 전통을 계승해야 하는 것은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계승’을 천명하였다는 형식적 의미 뿐 아니라, 1940년 창군한 ‘한국광복군’은 대일선전포고(1941년)가 가능하도록 했으며, 미얀마 등지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고, 조선의용대 참여로 좌우합작을 이루었으며, 꿈에도 그리던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는 등 그 의미가 너무나 깊다. 그러므로 이를 계승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우리 시민과 정부의 당연한 의무이다.

 

그러나 현재 충칭 소재의 총사령부 건물이 중국의 재개발로 금방이라도 무너질지 모른다는 비보가 들려와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정도로 광복군정신을 계승하는 것을 소홀히 하고,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인 일본제국주의 군대에 찌든 친일파들이 군대를 장악하는 것을 방치한 결과, 우리 군대는 한국전쟁전후 잔혹한 100만 민간인 학살과 박정희, 전두환 주동의 두 차례 군사쿠데타를 자행하고, 80년 5월 저 처참한 광주학살을 하는 등 민족사에 치욕적인 군대가 되어갔으며, 미국의 침략전쟁인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인류사의 전범 군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김대중 정부로부터 민주정부 10년을 거치면서 제2의 창군, 국방개혁2020 등 외형적으로나마 많이 나아졌으나, 전근대적 군사독제의 강압이나 민족 분열적 냉전논리가 아닌, 시민의 자발적인 합의를 통하여, 군대의 정신적 측면의 개혁과 민주 군대, 군대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시대 군사부문 대응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방안은, ‘광복군정신계승’에 있음을 지난 세월 우리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 시발점은 한국전쟁 당시 3.8선을 넘는 날을 기념하는 10.1일 ‘국군의 날’을 ‘한국광복군창군일’ 9.17일로 바꾸는 것과 ‘한국광복군청사복원’으로부터 되어야 한다.

 

2010년 9월 17일은 중국의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식적 군대인 ‘한국광복군’이 벅찬 감동으로 창군한 지 70년이 되는 뜻 깊은 날이다.

 

일제 치하에 민족의 고혈로 호의호식한 친일 음악가들의 음악을 확인하고, 동 시대를 항일 음악과 독립군가를 만들고 부르면서 항일의지로 불태웠던 ‘한국광복군’을 되새기면서, 친일의 잔재로 얼룩진 한국의 음악현실과 같은, 한국 군대의 현실과, 나아가 우리사회 전반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를 바로 잡으려는 의지를 함께하는 자리를 갖고자 한다.

 

 

주 관: 평화재향군인회

주 최: 한국광복군창립70주년 친일&항일 시민음악회추진위원회참여단체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사단법인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  유족회, 민족정기구현회, 사법정의국민연대, 새날희망연대,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 반민특위 전국연대(준), 민주전역시민회, 촛불예비군, 촛불연행자모임, 개념찬해병대,

안티MB, 자주역사신보, 전남한국엘리트스포츠지도자연합회, (사)평화통일화해연구원,

정치발전연대, 꿈꾸는예술, 한국진보연대등)

 

주최단체로 참여하실 개인이나 단체는 

 xxkf83@hanmail.net이나 010-9074-6128로 연락부탁드립니다.

언제든 환영합니다.

  

후원단체: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민중의 소리, 서프라이즈,

사람일보, 민주노동당 서울시위원회

 

 

1940.09.17 창립한 한국광복군의 역사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1. 준비

 

 

한국광복군은 1939년 1월 8일 창립된 임시정부의 여당 한국독립당 당군(黨軍)을 모태로 하였다.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성립전례식을 준비, 계획하였다. 40년 5월 임시정부 측은 중국 정부 장개석 주석에게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할 것을 교섭하였고 중국 국민당군의 지휘 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광복군 창립을 허락받았다.

 

 

      


        
    광복군의 훈련 모습 
     

 

2. 창군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成立典禮)를 가지고광복군을 발족시켰다. 이는 3.1 독립선언 이후 독립한국의 통일정부를 자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인 광복군의 창군은, 중앙군 없이 의병과 비정규군만으로 항일무장투쟁을 펼치던 독립운동 세력에 정규중앙군이라는 구심점이 생겼다는 것과, 군대 없이 외교, 선전, 테러에만 치중하여 그 활동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임정이 명실공히 정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데서 의의가 있었으며, 이는 대한제국 군대가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지 33년, 임정이 수립되어 독자적인 군대를 편성해 광복전쟁을 수행한다는 목표를 밝힌 지 21년 만이다. 발족일을 전후하여 광복군 조직의 포고문과 그 밖의 선전 전단(傳單)이 배포되었고, 임시의정원에서는 관계법규를 정비하였으며, 총사령에는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이 취임하였다. 광복군의 편성은 임시정부에서 제정한 군사법규인 육군임시군제(陸軍臨時軍制) ·육군임시군구제(陸軍臨時軍區制) ·임시육군무관학교조례(臨時陸軍武官學校條例) ·군사경위근무조례(軍事警衛勤務條例) ·경위근무세칙(警衛勤務細則) ·군무부임시편집위원부규정(軍務部臨時編輯委員部規定) 등 군사활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규정에 따랐다. 중화민국 정부는 광복군을 인정하는 대신 1941년 11월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韓國光復軍九個行動準繩)을 하달하고, 임정은 한국광복군 공약과 서약을 발표하는 등 갈등하고,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를 설득하는 한편 임정 소재지를 미국워싱턴 D.C.으로 옮길 것을 계획하는 등의 노력 끝에, 1944년 8월에야 위 준승을 폐기하고 군 통수권을 환수하였다.

 

 

 

 

한국광복군 신분증 및 수창증명서

 

 

3. 성장과 활동

 

한국광복군은 먼저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한인 항일 군사조직을 흡수하여 통합하는 데에 진력하였다. 1941년1월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편입되었으며 1942년7월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흡수하였다. 이로써 광복군은 지청천 총사령과 김원봉 부사령 밑에 3개 지대와 제3전구공작대·제9전구공작대·토교대를 두게 되었으며, 중국 각지에 징모 분처를 설치하고 한국청년훈련반과 한국광복군훈련반이라는 임시훈련소를 운영했다. 기관지 '광복'을 펴내기도 했다. 임정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1941년12월 9일일제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에 파견되어 인도·버마 전선에 투입되었으며, 그 뒤 임정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한 도노번 장군에게 OSS 특별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1945년4월 당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광복군의 총 병력 수는 339명이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700여 명으로 성장하였다.

 


             조선 의용대를 흡수하며 기념촬영          

 

         
                   

                   광복군 사열식         
      

 

4. 국내정진작전과 국군자격 귀국의 좌절

 

임정은 일제의 항복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력으로 국토를 수복하기로 하고, 1945년8월 11일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을 편성했다. 8월 16일미군 비행기를 통해 그 선발대가 한반도로 향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가 아직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무전을 받고 회군하였다. 이틀 뒤 8월 18일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해 서울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뒤 임정은 10만 명의 광복군을 편성해 해방된 한국 정부의 국군 자격으로 귀국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일본군에 소속됐던 한국인 병사들을 편입시켜 조직을 확대했다. 오광선을 국내지대장으로 파견해 서울에 한국광복군 국내지구사령부를, 대전에 한국광복군 경비대 훈련소를 개설했다. 그러나 광복 후 아무런 저항 없이 한국에 진주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던 미군정은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을 내려 광복군 국내지대를 해체시켰으며, 귀국길이 막혀 버린 중국 주재 광복군도 1946년5월 16일 중국국공내전(國共內戰)의 혼란 속에서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1946년 2월부터 6월 사이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사진첩

 

 

 

헐리는 광복군 청사, 묻혀져 가는 광복군 정신



대한민국 군인의 정신이 담긴 광복군청사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방치하고 있는 정부는 무얼하는가?



2009년 9월 평화재향군인회와 백범사상실천연구회가

충칭 광복군청사답사에서 찍은

철거위기에 놓인 광복군청사 쓰러져가는 사진입니다.

 

 

충청시 재개발 계획에 의해 사령부 청사 일대에 초고층 건물이 들어선다.

현재 일부 철거작업 중이다

 

 

중국 충칭에 있는 광복군 사령부 청사.

 

 

 

 

 

평화제향군인회의 '한국 광복군' 까페 바로가기- http://cafe.daum.net/HKB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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