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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독립운동사에 확연히 대비되는 피로 쓴 두 개의 글씨

글쓴이 : 꺾은붓 날짜 : 2016-10-17 (월) 18:41 조회 : 164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확연히 대비되는 피로 쓴 두 개의 글씨


1. 안중근
  1879. 9. 2.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시다.
  30세 전후의 청년 안중근은 조선 500년 사직이 다 했음을 직감하고 구국의 길에 나서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청국 령 만주로 넘어간다.
  이때 만주에는 안중근과 같은 뜻을 가진 조선청년들로 넘쳐났다.
  안중근은 이들과 의기투합하여 조선독립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1909. 3. 5. 이를 확약하기 위하여 12인의 왼손 무명지 끝 마디를 자른다.
  12인의 손가락 끝에서 쏟아져 나오는 검붉은 피로 태극기의 4괘 자리에 돌아가면서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는 글씨를 써 넣어 “건”, “리”. “감”, “곤”을 대신한다.

                “대(大)” “한(韓)” “독(獨)” “립(立)”
       
  안중근 의사가 남긴 수형(手形)에서 네 번째 무명지가 끝의 새끼손가락보다 약간 짧게 나타나는 게 바로 이 단지 때문이다.
  그러니 그 수형은 안 의사께서 단지를 하신 1909. 3. 5이후에 수결하신 것임이 확실하다.
 
  1909. 10. 26
  안중근 의사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러시아 재무장관과 열차회담을 마치고 자신의 열차로 돌아가던 우리겨레의 철전지 원수 이토히로부미를 대한독립군 의병중장자격으로 15개 죄목으로 처형을 하시다.
  일설에는 이토를 저격하고 나서 러시아경찰과 왜경에게 체포되기 직전에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러시아어로 “대한 만세”를 외칠 때 흔들었던 태극기가 그 단지동맹현장에서 그린 태극기라고 하기도 하나 확실치는 않은 것 같다.
  1910. 3. 26. 그가 그렇게 걱정했던 한일병탄을 5개월 3일 앞두고 형이 집행되어 31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을 하시다.


2. 박정희
  1917. 11. 4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이 겨레의 축복인지 저주인지 박정희라는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안중근의사께서 세상에 태어나신지 38년 뒤이고, 순국을 하시고 나서 7년 뒤였다.
  1937년 20세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훈도(오늘날의 초등학교 선생)가 되어 문경보통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음
  교편을 잡을 당시는 일본이 전 아시아를 점령하고 미국까지 넘보던 시절로서 조선의 일본병탄은 영원할 것 같은 시기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만주와 상해에서는 눈물겨운 독립투쟁이 전개되고 있던 시기이다.

  당시는 전 조선백성이 애써 농사지은 쌀은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모두다 왜놈에게 빼앗기고, 왜놈들이 배급을 준 썩은 깻묵과 콩비지 그리고 초근목피로 죽지 못해 연명을 하던 시기이다.
  오늘날도 초등학교 교사는 선망의 직업이지만 당시의 초등학교 선생은 조선 사람으로서는 꿈과 같은 직업이었다.
  우선은 의식주에 걱정이 없었고, 조선 사람으로서 한 번 끌려가면 8~90%는 죽거나 불구가 되는 강제징용에서도 훈도는 예외가 되던 시절이다.

  20대 초반의 팔팔한 청년 박정희는 출세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길이 매국이 되었던 애국이 되었건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그저 출세만 할 수 있으면 되었다.
  그렇게 좋은 직업인 훈도를 다 떨어진 헌 짚신짝 내 팽개치듯 미련 없이 차 버리고 출세의 길을 찾아 만주로 건너가서 왜군장교가 되는 군관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초등학교훈도를 하느라 박정희로서는 3년 허송세월을 보낸 바람에 연령초과로 군관학교의 입교를 거절당했다.
  여기서 박정희가 생각해 낸 것이 안중근 의사를 본뜬 손가락을 째는 것이었다.
  군관학교에 입교를 거절당한 박정희는 군관학교에 입교만 할 수 있다면 목숨을 내놓는 것 빼 놓고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큰 한지 한 장을 사다놓고 미련 없이 이빨로 손가락을 우지끈 깨물어 쏟아져 나오는 피로 일필휘지로 써 갈겼다.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

  원래 글씨, 특히 붓글씨에는 조금은 소질이 있었다.
  그 혈서가 왜의 괴뢰국 만주신문에 실리고, 히로히또의 눈에 까지도 뜨이게 되어 만주국신경군관학교에 특별입학이 하락되고, 다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일본 육사에 편입되어 일본이 패망하기 바로 1년 전에 꿈에도 그리던 왜군장교가 되어 만주로 금의환향을 했다.
  그 때는 상해에서 출발한 임시정부가 중국천지를 떠돌며 헤매는 노숙자 신세가 되어있을 때였다.
  그 뒤 박정희, 아니 다까끼마사오 중위의 만주벌판을 주름잡는 눈부신 활약상은 필자로서는 자세히 아는 게 없다.
  언젠가 다까끼 소위와 같이 만주에서 종군을 했던 만주군 출신 일본인이 박정희를 기억하는 글에서 “남들과 대화도 일절 없고 항상 침울한 성격이지만 상급간부로부터 ‘내일 조선독립군 토벌을 나간다.’는 전갈을 받으면 그 순간 ‘요시!’ 하면서 총구를 쑤시고 개인무기를 손보며 전혀 딴 사람이 되더라.” 는 토막 애기를 얼핏 읽은 게 전부다.

  3. 혈서의 해설
  필자는 한자(漢字)에는 까막눈이어서 피로 쓴 저 위 두 개의 혈서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박정희가 쓴 혈서가 어느 나라 누구에게 충성을 하겠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4. 해방이 되고  35년이 흐르고
  김재규에 의해 궁정동 안가에서 최후를 맞은 박정희는 그보다 앞서간 육영수와 함께 동작동국립묘지 최 상석에 뉘여 졌다.

  5. 안의사가 목숨을 바쳐 바랬던 독립이 되고 70년이 흘렀건만
  루쉰 감옥에서 처형된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중국과 국교도 수립되었고, 안의사는 중국에서도 영웅으로 떠받들고 계시니 한국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그가 그리던 고국으로 모셔 오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웬일인지 효창공원의 백범 묘소 아래에 허묘만 하나 달랑 조성되어있다.

  6. 박정희가 가고 또 35년이 흐르고
  박정희의 딸이 5천만이 보고 당하는 것과 같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주물러 대고 있다.

  7. 국민들이여!
  오늘 우리는 어떤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단군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배달겨레가 맞습니까?
  아니면 갓 고깔 쓴 말과 소가 사람이 먹는 밥을 먹으며 짐승이 사람 흉내를 내고 있는 것입니까?

  박근혜가 휘젓는 나라 꼴을 바라보는 심정이 청이가 공양미 3백석을 받아 놓고 눈먼 아비를 험한 세상에 홀로 남겨두고 인당수로 끌려갈 날 만을 기다리는 심정과 똑 같습니다.

☞특수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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