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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회강좌 한국근대사와 문학(시대상을 중심으로)

글쓴이 : 이시대 날짜 : 2010-08-14 (토) 18:03 조회 : 3110

제 2회 집중강좌 한국근대사와 문학(시대상을 중심으로) 강의를 해주신 세종대 정현기 교수님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 곁에서 20년을 함께해온 정현기 교수는 모든 문학, 시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강연해주셨다.








*집중강좌*

시와 시대정신


한양대학교 특강을 위한 자료

―안중근 기념사업 교육 특강 자료 2010년 8월―

정현기(문학평론가, 세종대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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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1910년에 왜국은 한국을 강제 병탄함으로써 36년 동안 한국 사람들에게 깊은 아픔과 치욕을 안겼다. 이 이런 정치적인 일들은 대체로 야심 많은 각국 정치가(?)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고, 남을 자기 행복이나 부국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부라퀴(악당)들은 바로 그런 정치라는 이름을 뒤집어 쓴 사람들이다. 한국이 이렇게 왜국으로부터 참혹하게 강탈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 뒤에는, 왜국을 부추겨 자기들의 제국주의 책략을 확장하려던 미국의 음모가 있었다. 그 음모에 대한 구체적이고 뚜렷한 증거는 이렇다. 1905년도에 한국 몰래 맺은 <카츠라-태프트 밀약>을 보기로 한다.

 

카츠라 백작과 태프트 국무장관

1905년 7월 27일 아침 장시간 비공개 대화를 가졌다

 

첫째 미국 내 친(親)러시아 인사들이 일반대중에게 일본의 승리는 필리핀 열도를 공격하려는 확실한 전조일 것이라고 믿게 하는 것에 대하여 태프트 국무장관은 개인의 의견으로 필리핀에 있어서 일본이 지닌 단 하나의 관심은 이 섬들을 미합중국과 같이 강하고 우호적인 국가가 지배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말했다... 카츠라 백작은 가장 강력한 용어를 사용하여 그 문제에 관하여 자신의 견해가 올바르다고 확답하였고 일본은 필리핀에 공격적인 어떠한 복안도 품고 있지 않다고 확언하였다.

둘째 카츠라 백작은 극동지역에서 대체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일본의 국제정책에 근본적인 원리를 이루고 있다고 진술하였다. 사정이 이럴 진데 ... 가장 훌륭하고, 사실 하나밖에 없는, 상기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은 일본정부와 미국정부와 영국정부 간에 선의의 이해를 이룩하는 것이다...

셋째 한국문제에 대하여 카츠라 백작은 러시아와 우리가 수행하는 전쟁의 직접원인이므로 한반도 문제의 완벽한 해결은 전쟁의 논리적 귀결로서 작성되어야 하는 것이 일본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사안이라고 진술하였다. 내버려 둔다면 전쟁 후에 한국은 전쟁 전과 같이 앞일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강대국들과 협정과 조약을 체결하는 상태로 돌아갈 것이고 따라서 전쟁 전에 있었던 동일한 국제적 분규를 재발시키게 된다. 앞으로 다가올 상황을 보건데 한국이 전과 같은 조건으로 후퇴되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우리 합중국이 또 다른 외국과의 전쟁에 돌입하는 필연에 놓이지 않도록 일본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 태프트 국무장관은 백작 생각의 정당성을 전폭적으로 받아드리고 개인 의견으로서 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지 못하는 정도로 한국 내 일본군대를 주둔시켜 종주권을 세우는 것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가져올 논리적 결과이며 동아시아에 영구평화를 이루는데 직접적으로 기여하게 된다고 이러한 취지로 언급했다. 국무장관이 이 문제... 확답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무장관의 판단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하여 동의할 것이라는 바이다.

 

1905년 7월, 국무성 잡다한 문서 제3부

일본외교연표 (竝) 주요문서 (상)

일본 외무성 편(소화 40년 11월 25일)

 






桂 태프트 協定駐 本覺書關係書類일어?燒失 일어?, 참고 일어? 米國務省 文書일어 收錄 일어. THE TAFT-KATSURA AGREEMENT…COUNT KATSURA and Secretary Taft had a long and confidential conversation on the morning of July 27…First, in speaking of some pro-Russians in America who would have the public believe that the victory of Japan would be a certain prelude to her aggression in the direction of the Philippine Island, Secretary Taft observed that Japan's only interest in the Philippines would be, in his opinion, to have these islands governed by a strong and friendly nation like the United States, …Count Katsura confirmed in the strongest terms the correctness of his views on the point and positively stated that Japan does not harbor any aggressive designs whatever on the Philippines…

Second, Count Katsura observed that the maintenance of general peace in the extreme East forms the fundamental principle of Japan's international policy. Such being the case, …the best, and in fact the only, means for accomplishing the above object would be to form good understanding between the three governments of Japan, the United States and Great Britain…

Third, in regard to the Korean question Count Katsura observed that being the direct cause of our war with Russia, it is a matter of absolute importance to Japan that a complete solution of the peninsula question should bee made as the logical consequence of the war. If left to herself after the war, Korea will certainly draw back to her habit of improvidently entering into any agreements or treaties with other powers, thus resuscitating the same international complications as existed before the war. In view of the foregoing circumstances, Japan feels absolutely constrained to take some definite step with a view to precluding the possibility of Korea falling back into her former condition and of placing us again under the necessity of entering upon another foreign war. Secretary Taft fully admitted the justness of the Count's observations and remarked to the effect that, in his personal opinion, the establishment by Japanese troops of a suzerainty over Korea to the extent of requiring that Korea enter into no foreign treaties without the consent of Japan was the logical result of the present war and would directly contribute to permanent peace in the East. His judgement was that President Roosevelt would concur in his views in this regard, although he had no authority to give assurance of this…

Miscellaneous Letters of the Department of State, July, Part Ⅲ, 1905.日本外交年表 竝 主要文書 (上)일본 외무성 편(昭化 40년 11월 25일)

 

이런 수상하고 캄캄해 가던 시대에 위대한 우리의 안중근 의사가 한 일을 우리는 잘 안다. 이등박문을 쏘아죽이고 나서 그가 보여준 의연하고도 당당한 법정진술 내용은 지금 우리가 읽어도 가슴을 떨리게 한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역사학 쪽의 전문 학자인 신운용 박사가 더욱 자세한 자료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였거나 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기로 한다. 나는 문학 전공자이기 때문에, 문학 작품 몇 편을 가지고, 우리의 근 현대사에 우리가 겪었던 질곡과 아픔을 견디던 방식을 이야기 해 보려고 한다. 문학에 대한 이야기에서 문학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정의 하나를 보이면; 문학은 곧 시대를 반영한다는 풀이이다. 미메시스(mesis), 재현, 모방, 반영 등으로 옮겨지는 이 정의는 퍽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학의 정의이다.

 

모든 시는 시대를 퍼 옮겨 담는다.

 

1. 첫째 시 하나를 보인다. 1922년에 발표한 이상화의 것이다.


나는 걱구러지련다

나는 파뭇치이련다


가을의 병든 微風의품에다

아―꿈꾸는 微風의품에다

낫도모르고

밤도모르고

나는 술취한집을 세우련다

나는 속압흔우슴을 비즈련다.

 

1922년 1월 이상화(李相和=雅號는 想華․無量․尙火․白啞=1901년, 4월 5일-1943년 4월 25일 사망)가 <백조>창간호에 실린 「末世의 欷嘆」 전문이다. 이 시가 보여주는 이유는 그의 대표작에 속하는 다음 작품을 소개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2. 두 번 째 이상화의 시를 보인다.

 

나의 침실로

가장 아름답고 오오랜 것은 오직 꿈 속에만 있어라, [내 말]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돌아 가려는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 오너라.

 

<마돈나> 오려므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도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 닭이 울고―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욱―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촉불을 봐라,

양털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얄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르메가, 도깨비처럼, 말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가슴이 뛰노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 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이도 없느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엽서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내 몸의 피란 피―가슴의 샘이, 말라버린 듯, 마음과 목이 차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은 믿는 <마리아>―내 침실이 부활의 동굴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꿈이 다르지 않으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1923년 <백조>3호에 실린 세 편의 시 가운데 하나


3. 세 번 째 윤동주의 시를 보인다.

 

십자가(十字架)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 꼭대기

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鍾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41, 5, 31

 

1941년이면 왜정의 육해군 쪽에서 강압하여 이미 조선인들의 말글은 물론이고 이름과 성까지 빼앗아 주체성의 목을 조이던 시절이었다. 자신이 익숙하게 써 오던 말글과 익숙하게 남을 부르고 남에게 불리던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어둠 속에 놓이면 우선 답답함이 목을 조인다. 이럴 때 찾는 빛은 곧 생명의 끈이다. 윤동주는 예수의 생애를 정확하게 읽었다. 그리고 그의 회생이 한 살이에서 가장 행복한 삶임도 그는 꿰뚫어 읽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삶의 길을 선택하여 걷게 될 때 반드시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는 아픔과 외로움을 또한 깊이 읽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짊어진 어둠과 아픔, 슬픔과 나락에 떨어지는 절망, 그 모든 삶의 질곡을 한 몸으로 짊어진 예수가 곧 빛이며 삶의 길임을 그는 알아 그것을 시로 옮겨 놓았다. 그렇게 그의 시적 자아는 자아의 길을 예수의 생애에 맞추어 결정하였고 빛 찾기의 빛 골목에 자기를 앉혀 놓았다. ‘쫓아오던 햇빛’ 그리고 그것이 걸린 ‘십자가’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빛이다. 잘 사는 길의 샘(도덕성원천)인 빛, 그 빛이 되려고 할 때 각오해야 할 어떤 꼴의 아픔이나 슬픔, 모든 것이 다 그 빛 가르침 속에 들어있다.

 

 

4. 네 번 째로 윤동주의 시를 보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1941년, 11월 20일>

 

윤동주의 대표작이면서도 가장 깊은 뜻을 품고 있는 작품 ������서시������이다. 이 시는 불과 아홉 연에서 끝나는 작품이지만 여기 담긴 뜻은 정말로 깊고 크다. 동양철학에서 이른바 부끄러움(廉恥)이란 맹자의 이른바 <수오지심(羞惡之心)을 가리키는 것이고 삶의 올바름(義)을 풀이하는 철학적 잣대가 된다. 그런데 윤동주의 본능적으로 이 부끄러움을 노래로 읊어 그런 자기 치욕으로 가지 않기를 빌었다. 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남을 나의 수단으로 여기는 존재는 이미 부끄러움을 잃은 야수들일 뿐이다. 야수(野獸), 이 말은 들 고양이나 호랑이 노루, 야생 뱀이나 산토끼 류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사납고 고약한 부라퀴 악당을 일컫는 말이다. 모든 제국주의 찬양자들은 모두 다 부라퀴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바로 이런 부라퀴를 길러내려는 생각 틀임에 틀림이 없다. 신자유주의, 국제화, 세계화, 이런 말들 속에는 이미 악의 냄새가 짙게 배어 나타나고 있다. 1941년도에 윤동주는 이 세계가 악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음을 알았다.    



  부끄러움을 잃은 사람은 이미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사람은 오직 나와 남들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아 ‘나’를 만들어 가는 것이고 그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 받는다. 그런 관계망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바른 삶길 찾기(
도덕)라 부른다. 이 바른 삶길이 깨어진 시대를 타락한 삶터라 부른다. 그런데 바로 이 시가 씌어졌던 시대 1941년도는 왜정 강도들이 이미 더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움을 저버린 해였다. 왜놈들은 이미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해 이른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무수한 젊은이들을 끌어다 전쟁터에 내보내어 죽게 하였고, 국내에서는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거나 고문하면서 죽였다. 그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댄 이름으로 곡식이나 돈 심지어 놋쇠붙이까지 거두어들임으로써 한국 사람들의 재산을 약탈하였으며, 부녀자를 공출로 끌어다 겁탈, 정신대로 수모를 안겼다. 이미 그들은 사람됨 포기한 더러운 짐승들이었고 악행을 일삼는 악마들이었다. 그런 때에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노래하였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바란다고 씀으로써 그는 당대의 어둠을 쫓아내려고 노래하였다. 예술의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예술의 힘은 그것이 남을 위로하거나 슬픔이나 절망으로부터 마음을 돌려 기쁨이나 희망의 마음을 갖도록 해 주는 힘을 발휘할 때 가장 큰 힘을 내 뿜는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슬퍼하였고 절망에 빠져 있었을 때 그는
「십자가」「서시」를 써서 한국 사람들을 위로하였고 슬픔에서 벗어날 마음가짐을 갖도록 격려하였다. 앞에 보였던 1923년도에 발표한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또한 그런 예술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시」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내가 밑줄을 처 놓은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구절이다. 27살 나이에 자기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읊을 수 있었던 윤동주의 시적 자아는 어떤 사람이었나? 「서시」와 같은 해 몇 달 전에 썼던 「십자가」의 싯적 자아는 누구였나? 예수를 닮은 생애를 그는 노래로 이미 알렸다. 그런데 왜놈들은 그를 그렇게 죽였던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 못 박아 죽임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영원히 죄인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잃었듯이 왜놈들도 윤동주를 그렇게 죽임으로써 그들이 저지를 죄악의 늪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길을 잃었던 것이다. 그를 재판한 내용을 보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윤동주가 저지른 죄명이 무엇인지 왜놈 재판부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Ⅱ. 윤동주의 생애가 끝난 왜국 재판기록                   

 

    "어릴 때부터 民族的 學校敎育을 받아 思想的 文學書籍 等을耽讀함과 交友의 感化 等에 의하여 일찍이 熾烈한 民族意識을 품고 있었는데, 성장하여 內鮮 간의 소위 차별문제에 대하여 깊이 怨嗟의 마음을 품는 한편 我 朝鮮 統治의 방침을 보고 조선 固有의 民族 文化를 絶滅하고 朝鮮 民族의 滅亡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여긴 結果, 이에 朝鮮 民族을 解放하고 그 繁榮을 초래하기 위하여서는 朝鮮으로 하여금 제국 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위하여서는 조선 民族의 현시에 있어서의 實力 또는 과거의 獨立運動 失敗의 자취를 반성하고 당면 조선인의 實力, 民族性을 향상하여 獨立運動의 素地를 培養하도록 一般大衆의 文化昻揚 및 民族 意識의 誘發에힘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決意하기에 이르렀"다.

                                                  1944년 3월 31일

京都地方裁判所 第2刑事部

裁判長  判事   石井平雄

渡邊常造

瓦谷末雄                        

                        ―송우혜, 윤동주평전(서울:세계사,1998),323-4쪽 참조―

       

       

  그의 죄명은 ‘조선민족을 해방하고’, 조선이 독립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민족문화를 잊지 않도록 조선 국민들에게 민족성을 앙양케 함으로써 민족정신을 유발토록 하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다는 것이다. 나라를 빼앗겨 숨통조차 제대로 트지 못하는 식민지 질곡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자기 숨통 틀 궁리를 하는 것이 죄라고 왜정 법률은 윤동주를 판결하였다. 남의 숨통을 누르고 남을 살해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인류 공통의 죄악이다. 이런 죄악으로 조선 민족에게 악행을 저지르던 왜정 악당들은 바로 이런 식으로 윤동주를 살해하였던 것이다. 아마 지금도 지구 저 편 어느 곳에서는 이런 인류 공통의 죄악을 일삼으면서 평화를 가장하는 무리들이 설치고 있다. 이라크나 다른 나라에 들어가 전쟁을 도발하여 죄 없는 사람들을 살해하거나 가두어 고문하는 제국주의자들은 모두 이런 부류의 악당들이다. 윤동주를 죄인이라고 뒤집어씌운 이따위 범법행위는 왜정 당시에만 있었던 그런 죄악이 아니다.



  Ⅲ. 맺는 말



   그의 시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이 대표작품들이 얼마나 커다란 울림으로 우리 앞에 다가서는 지는 근래 젊은 학생들의 애송 순위 기록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읽기가 쉽고 그러면서도 깊은 울림을 지녔으며 그 말씀들이 품고 있는 철학적 깊이는 전 세계 어느 시인들의 별 같은 말씀 반열에 놓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 위 인용 시에서 아래 줄 친 부분은 내가 일부러 한 것이다.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윤동주 그는 이미 대학생 시절에 쓴 시에서 자아의 갈 길에 대한 방향을 밝혀놓았다. 예수의 생애를 닮겠다는 그 길 말이다. 그의 대표작 「서시」에서 부끄러움은 가장 큰 울림을 주는 발언이다. 죄진 사람들은 언제나 부끄러운 법이다. 이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생살이의 최종 꼭지 점을 부끄러움 없는 삶이라고 정했을 때 모든 사람은 이에 항복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죄악으로 물들어 세상을 온통 극악한 살육과 강도짓, 폭력으로 뒤덮어 놓던 왜정시대에 그는 그런 자기 성사를 읊었던 것이다. 염치를 모르는 사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 그것을 우리 사회에서는 가장 치욕스런 일로 여겼다. 부끄러움은 곧 한국 민족이 지닌 도덕 감정의 꼭지 점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그는 보편적이 말씀으로 시화하였다. 그러면서 자기는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읊었다.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 섰다는 짐 짊어짐이다. 요즘 어느 누가 과연 자기에게 주어진 길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다 큰 길로 가기 위해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이 시대, 일류대학 보내기 위해, 미국 유학보내기 위해, 영어를 미국사람처럼 말하고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별아별 추태를 다 벌이고 있는 시대에 그렇게 엄청난 위험과 아픔을 전제한 길,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읊을 수가 있을까? 윤동주 시의 미학적 높이는 이렇게 커다란 빛과 공활한 너비로 측량이 어려운 꼭지 점에 놓여 있다. 그것을 그는 죽음으로 실현하면서 이룩하였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선배 됨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시인 윤동주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이 행운이 여러 분들에게 곱게 받아들여지기를 빌 뿐이다.